[김민철의 꽃이야기] 자세히 보아야 예쁜 꽃, 여뀌
- 조선일보 김민철 논설위원
입력 : 2015.10.27 03:00
요즘 냇가·공터는 여뀌들 세상… 이삭 모양 꽃대에 붉은 꽃 촘촘
수수한 시골 아낙네 같은 꽃, '매운맛' 이용해 물고기 잡기도
개여뀌 흔하고 기생여뀌는 화려… 고마리·쪽이 비슷한 형제 식물
요즘 주변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꽃을 꼽으라면 여뀌를 빼놓을 수 없다. 6~10월 이삭 모양 꽃대에 붉은색 꽃이 좁쌀처럼 촘촘히 달려 있는 것이 여뀌 무리다. 냇가 등 습지는 단연 여뀌들 세상이고, 산기슭이나 도심 공터에서도 여뀌 종류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래서 가을은 여뀌의 계절이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여뀌는 흔하디 흔해서 사람들이 잘 눈길을 주지 않는 꽃이다. 그저 잡초려니 하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야생화에 관심 있는 사람도 여뀌는 너무 흔하면서도 복잡하기만 하다며 그냥 패스하는 경우가 많다. 여뀌는 다른 꽃을 보러 갔다가 우연히 예쁜 모습을 포착하면 담는 정도의 꽃이다. 다른 꽃들은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시도 많고 얘깃거리도 많은데 여뀌는 그런 것도 거의 없다. 여뀌는 그렇게 있는 듯 없는 듯 피고 지는 꽃이다. 더구나 소도 먹지 않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식물이라는 인식도 퍼져 있다. 논밭에도 무성하게 자라는 경우가 많아 농사꾼에게는 귀찮은 잡초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뀌도 잘 보면 수수한 시골 아낙네같이 예쁜 꽃이다. 꽃이 피기 전에는 빨간 좁쌀을 붙여 놓은 것 같다가 분홍빛의 작은 꽃들이 차례로 피는 것이 너무 곱다. 다만 꽃이 워낙 작기 때문에 자세히 보아야 볼 수 있다. 황대권은 '야생초 편지'에서 여뀌는 하나씩 떼어놓고 보면 참 예쁜 꽃이라고 했다. 그런데 워낙 무더기로 나니까 그저 귀찮은 풀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고마리·부레옥잠 등과 함께 수질을 정화하는 고마운 식물이기도 하다.
여뀌의 가장 큰 특징은 잎과 줄기에 '매운맛'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어 이름도 'Water pepper'다. 이 성질을 이용해 예전 아이들은 물고기를 잡을 때 여뀌를 짓찧어서 냇물에 풀었다. 그러면 물고기들이 맥을 못 추고 천천히 움직이는데 이때 빨리 건져올리곤 했다. 김주영의 소설 '홍어'에도 짓이긴 여뀌를 개울에 풀어 붕어와 피라미들을 잡는 이야기가 나온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여뀌라는 이름의 유래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꽃이 붉고 그 맛도 매워서 귀신을 쫓는다는 뜻의 역귀(逆鬼)에서 나왔을 것이라는 견해, 꽃대에 작은 꽃이 줄줄이 얽혀 있는 모습에서 유래했다는 견해 등이 있다. 일부 지방에서는 맵다고 '맵쟁이'라고 부른다.
여뀌 종류는 개여뀌, 이삭여뀌, 기생여뀌, 흰꽃여뀌 등 30가지가 넘는 데다, 구분 포인트도 모호해 정확한 이름을 알기가 쉽지 않다. 야생화 고수들도 여뀌 분류에는 애를 먹는 경우가 많다. 주변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개여뀌다. 밭가나 숲에서 군락을 이룬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대개 '개' 자가 붙으면 본래 것보다 쓸모가 없거나 볼품이 없다는 뜻인데, 개여뀌는 여뀌의 매운맛이 나지 않는다. 그냥 여뀌는 끝부분에 분홍색을 띠는 연녹색 꽃이 꽃대에 성글게 달리는데 개여뀌는 붉은색 꽃이 촘촘히 달린다.
여뀌 중 가장 화려한 것은 단연 기생여뀌다. 꽃 색깔도 진한 붉은색인 데다 아주 향긋한 냄새가 나서 기생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 같다. 자잘한 붉은 꽃이 드문드문 달리는 이삭여뀌, 붉은 가시 같은 털이 많은 가시여뀌, 꽃이 제법 커서 여뀌 중 가장 아름답다는 평을 받는 흰꽃여뀌 등도 그나마 특징이 뚜렷해 구분하기 쉬운 여뀌들이다.
여뀌와 비슷하게 생긴 형제 식물로 고마리와 쪽이 있다. 고마리는 잎이 서양 방패 모양으로 생겨 쉽게 구분할 수 있다. 가지 끝에 연분홍색 또는 흰색 꽃이 뭉쳐서 피는 것이 귀엽다. 쪽은 잎을 쪽빛 물감을 들이는 원료로 사용하기 위해 재배하는 식물이다. 쪽은 여뀌와 아주 비슷하게 생겼는데, 여뀌 잎은 매끈한 반면 쪽잎은 주름이 져 약간 울퉁불퉁한 점이 다르다.
여뀌를 얘기하면서 최명희 대하소설 '혼불'을 빠뜨릴 수 없겠다. '혼불'에는 '여뀌 꽃대 부러지는 소리'가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다. 예를 들어 2권에는 '강실이에게는 그 목소리조차 아득하게 들렸다. 그러면서 등을 찌르던 명아주 여뀌 꽃대 부러지는 소리가 아우성처럼 귀에 찔려왔다'는 대목이 있다.
그런데 왜 많은 식물 중에서 하필 여뀌일까. 이 소설의 배경은 전북 남원의 노봉마을이다. 남원을 가로지르는 강은 요천(蓼川)이고, '요'자가 '여뀌 요'자라는 것을 알면서 그 궁금증이 풀렸다. 요천은 여뀌꽃이 만발한 모습이 아름답다고 해서 얻은 이름이다. 얼마나 여뀌꽃이 만발했으면 이런 이름까지 얻었을까. 요천에 여뀌가 만발하니 요천 주변에 있는 소설 배경 마을도 당연히 여뀌가 흔했을 것이다. 요천은 광한루 앞 등 남원 시내를 가로질러 섬진강에 합류하는 샛강이다. 남원 사람들은 '요천수'라고 부른다.
남원시는 소설의 배경인 노봉마을을 '혼불마을'로 지정하고, 이곳에 '혼불문학관'을 지었다. 지난 주말 혼불문학관에 다녀오는 길에 요천에 내려가 보았다. 강변 정비사업을 대규모로 한 데다 달뿌리풀 등이 번성해 여뀌가 자랄 공간은 많이 줄어들어 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곳곳에서 전체가 붉게 물든 채 열매를 맺어가는 여뀌 무리를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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