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9월 15일 금요일

#KBS기독신우회, #박규남목사 ( #큰나무교회 )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 누가복음 5장1절~5장7절 / 전달: #KBS강성실 [눅]5:5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오늘 생각해 볼 책으로는 #피로사회 - 한병철 (지은이), 김태환 (옮긴이) | 문학과지성사 #분노사회 - 현대사회의 감정에 관한 철학에세이 , 정지우 (지은이) | 이경 #승자독식사회 - 로버트 H. 프랭크(대학교수), 필립 쿡 저 권영경 역 웅진지식하우스 #단속사회 - 엄기호 (지은이) | 창비 목사님 생각에는 지금 우리 사회는 #절망사회 라고 표현하고 싶다고.. 이슬람 선교의 아버지인 사무엘 즈웜머 Samuel M.Zwemer(1867~1952) #사무엘즈웜머 #SamuelZwemer [Book] The rise of Christianity - Rodney Stark #theRiseOfChristianity #RodneyStark The Rise of Christianity: How the Obscure, Marginal Jesus Movement Became the Dominant Religious Force in the Western World in a Few Centuries [책] 기독교의 발흥 (사회과학자의 시선으로 탐색한 초기 기독교 성장의 요인) - 로드니 스타크 저, 손현선 역, 좋은씨앗 #기독교의발흥 #로드니스타크 <도서 소개> 로마 제국의 변방에서 시작된 미약한 예수 운동이 어떻게 단 몇 세기 만에 서구 세계를 지배하는 종교 세력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을까? 〈2016 선교한국 대회의 책〉 선정 도서! 이 책은 그리스도인이 펴낸 신학서적이 아니다. 기독교에 특별한 애정이 없는 종교사회학자가 특유의 시선으로 바라본 초기 기독교 발흥에 대한 탐구서다. 현대의 사회학적 이론과 분석 방법을 동원해 초기 기독교가 급성장한 요인을 탐색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성경이 전하는 초기 기독교의 모습에 대해 사회과학자로서 그가 피력하는 견해는 기독교인들에게 다소 언짢을 수 있다. 그럼에도 ‘초기 기독교의 발흥’에 대한 탐구서로서, 이 책은 깊은 영감을 준다. 거대한 이방 세계의 변방에서 출발한 미약한 종교 운동으로서 기독교가 어떻게 단 몇 세기 만에 세상을 지배하는 종교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300년의 기적 같은 부흥의 이면에는 그저 ‘기적’이라고만 치부할 수 없는 현실 속 요인들이 있지 않았을까? 로드니 스타크는 이 화두를 놓고 사회학자의 시선으로 2천 년 전의 세계를 깊이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가 길어 낸 통찰들은 역설적이게도 지금 이곳에 자리한 기독교에 매우 도전적인 결과물로 남았다. -------------------------------------------------------- 이슬람 선교의 아버지인 사무엘 즈웜머 -CP교회연합신문선교칼럼- 요즈음 카이로가 심상치 않다. 민주화 바람이후에 기독교에 대해서 심한 박해의 태풍이 불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그 땅에서 17년 동안 사역하였던 한 사람의 선교사를 소개 한다. 사무엘 즈윔머(Samuel Zwemer)는 1867년, 미국 미시간의 홀랜드(Holland)에서 열다섯 자녀 중 열 세번째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개혁교회의 목사였기 때문에 기독교적 토양 속에서 훈련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여러 형제 가운데에서 생존한 5형제 중 4명도 목회자가 되었으며 누이인 넬리(Nellie)즈윔머는 선교사로서 중국에서 40여년 동안을 사역하였다. 즈윔머가 선교사가 되기로 작정하게 된 동기는 호프대학(Hope College)에 재학중 일 때였다. 그는 4학년 재학 중 일 때에 죤 모트와 헐몬산의 100명을 감동시킨 로버트 윌더의 감동적인 설교를 듣고 7명의 학우 중 5명과 함께 선교사로 자원하였다. 신학교육과 의료교육을 받고난 이후에 즈윔머는 제임스 캔틴과 함께 개혁교회의 선교부에 아랍 쪽의 선교사로 보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거절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물러서지 않고 스스로 미국아랍선교회(American Arabian Mission)를 조직하여 모금운동을 시작하였다. 쉽지 않는 일이었지만 6,000Km 이상을 여행하며 선교의 도전과 함께 모금 요청을 하였다. 이들의 모금 방식은 특이한 전략을 가졌다. 즉 즈윔머는 캔틴의 모금을, 캔틴은 즈윔머의 모금을 진행하였다. 모금에 대한 어려움을 즈윔머는 “담임 목사님들의 냉담한 반응이 제일 큰 장애 요소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1889년 캔틴은 모금 여행을 마치고 아라비아로 떠났으며 1890년 즈윔머도 뒤를 따랐다. 페르시아만(Persian Gulf)에서의 사역 초기에는 진전도 없었고 반대도 심했다. 그러나 그들은 낙심하지 않았다. 이후에 팀이 나뉘어 사역하게 되었고 독신으로 5년을 고생한 즈윔머는 성공회의 교회 선교회에서 파송된 에이미 윌크스(Amy Wilkes)라는 간호원과 사랑하게 되어 결혼을 하게 되었다. 1897년 미국에서 안식년을 보낸 부부는 이후 페르시아만으로 돌아가 바레인의 무슬림들을 위해서 사역을 하였다. 전도지를 나누어 주고 노방전도를 하며, 가정을 심방하면서 복음을 전했지만 차가운 무슬림의 마음을 녹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후 가정적으로 슬픈 일이 있었다. 1904년 7월 네 살과 일곱 살 난 두 딸이 8일 간격으로 잇따라 눈을 감았다. 이러한 극한 상황 속에서도 결코 하나님을 원망하지는 않았다. 1905년 즈윔머의 아람 선교회는 4개의 기지를 갖게 되었으며, 개종자의 수는 적었지만 용맹스럽게 선교하였다. 이후에 미국으로 돌아가 동원 사역을 감당했지만 마음은 항상 무슬림 땅에 있었다. 결국 1912년 미국 장로교 선교회(United Presbyterian Mission)로부터, 카이로로 옮겨서 전 이슬람 세계를 위해서 선교사역을 하자는 제의를 받아드림과 함께 카이로에서 사역을 시작하였다. 카이로에 도착한 즈윔머는 청년들이 서구로부터 온 지식인 선교사로부터 열심히 배우고자 하는 개방적인 마음을 알았다. 그는 매주 마다 카이로의 아메리카대학에서 강의를 하였는데 학생들로부터 많은 호응을 받았다. 때로는 2만명 가까운 이슬람학생들 앞에서 집회를 인도하기도 하였다. 즈윔머의 사역 가운데 특이한 사건은 한 무슬림청년의 개종 이다. 즈윔머가 배포한 기독교서적을 무슬림 교수가 찢어서 쓰레기통에 버렸는데, 한 학생이 그 찢어진 전도책자를 붙혀서 읽다가 변화를 받아서 기독교로 개종을 하였다. 참으로 하나님의 선교를 알 수 없는 놀라운 일임을 알 수 있다. 즈윔머는 17년 동안을 카이로에 기거 하면서 선교본부를 조성하고 이슬람땅 사역의 교두보를 마련하였다. 이후에 세계를 다니면서 선교회의에 참여하였고, 선교기금을 확보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도, 중국, 인도차이나, 남아프리카의 무슬림들을 위해서도 사역을 하였다. 즈윔머의 사역은 점점 넓혀져 갔다. 특히 그가 집필한 무슬림 세계(Moslem World)는 영어권에서 무슬림 선교에 가장 권위 있는 책으로 정편이 나있다. 즈윔머의 생애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 특히 어린 딸과 동료들 그리고 두 아내의 죽음(한명은 1937년, 다른 한명은 1950년)은 참으로 어려운 고통 이었다. 이러한 극한 어려움을 이기고 20여명의 숭고한 신자를 얻었고 무슬림 선교의 아버지가 되었다. -------------------------------------------------------- 폴 벤더 사무엘(Paul Bendor-Samuel) 선교사는 유럽 교회가 직면한 가장 큰 위기도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이슬람의 성장'이 아닌 '세속주의'로 단언했다. 사무엘 선교사는 "유럽의 교회들이 텅 비는 이유는 기독교인들이 무슬림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며 "사람들이 교회를 나가야할 이유가 사라지고 있다. 신앙이 점점 삶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주일에 영화관을 가거나 취미를 즐기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마치 무슬림들이 온 유럽을 뒤덮을 거라는 두려움이 커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며 "이슬람포비아를 확산시키는 잘못된 통계가 양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무슬림의 출생률은 그들의 교육 수준이나 부의 수준에 따라 굉장히 다양하게 나타난다"며 "무슬림 여성들의 교육 수준이 높아지면서 출산율이 낮아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교회, 무슬림에게 하나님의 사랑 전해야"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이슬람에 대한 우려에 대해서도 지나치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는 "최근에 한국의 종교 중에서 기독교가 가장 큰 규모라는 통계가 발표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오늘날 한국교회가 마주한 가장 큰 도전은 이슬람이 아니라 아무 신도 믿지 않는다고 대답한 사람들이 증가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의 역할은 "세속적이고 물질주의적인 환경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라며 무슬림들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그 사역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무엘 선교사는 "90%에 가까운 무슬림들이 기독교인과 친교를 나누고 있지 못하다는 충격적인 통계가 있다"며 "기독교인들은 우리에게 다가온 무슬림들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환영하고 우리에게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나눌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한편, 폴 벤더 사무엘 선교사는 인터서브 소속으로 1990년부터 2002년까지 튀니지에서 무슬림을 대상으로 의료선교 사역을 펼쳤다. 이후 2003년부터 12년 동안 인터서브 국제총재로 섬겼다. 현재는 옥스퍼드 선교연구센터(Oxford Centre for Mission Studies) 디렉터를 맡고 있다. (c) 데일리굿뉴스

#KBS기독신우회, #박규남목사 ( #큰나무교회 )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 누가복음 5장1절~5장7절 / 전달: #KBS강성실
[눅]5:5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오늘 생각해 볼 책으로는 
#피로사회  - 한병철 (지은이), 김태환 (옮긴이) |  문학과지성사
#분노사회 - 현대사회의 감정에 관한 철학에세이 , 정지우 (지은이) | 이경
#승자독식사회 -   로버트 H. 프랭크(대학교수), 필립 쿡 저  권영경 역  웅진지식하우스
#단속사회 - 엄기호 (지은이) | 창비

목사님 생각에는 지금 우리 사회는  #절망사회 라고 표현하고 싶다고..
이슬람 선교의 아버지인 사무엘 즈웜머 Samuel M.Zwemer(1867~1952)
#사무엘즈웜머 #SamuelZwemer
[Book] The rise of Christianity - Rodney Stark  #theRiseOfChristianity #RodneyStark
The Rise of Christianity: How the Obscure, Marginal Jesus Movement Became the Dominant Religious Force in the Western World in a Few Centuries 
[책] 기독교의 발흥 (사회과학자의 시선으로 탐색한 초기 기독교 성장의 요인) - 로드니 스타크 저,  손현선 역,  좋은씨앗
#기독교의발흥 #로드니스타크
<도서 소개>
로마 제국의 변방에서 시작된 미약한 예수 운동이 어떻게 단 몇 세기 만에
서구 세계를 지배하는 종교 세력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을까?
〈2016 선교한국 대회의 책〉 선정 도서!
이 책은 그리스도인이 펴낸 신학서적이 아니다. 기독교에 특별한 애정이 없는 종교사회학자가 특유의 시선으로 바라본 초기 기독교 발흥에 대한 탐구서다. 현대의 사회학적 이론과 분석 방법을 동원해 초기 기독교가 급성장한 요인을 탐색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성경이 전하는 초기 기독교의 모습에 대해 사회과학자로서 그가 피력하는 견해는 기독교인들에게 다소 언짢을 수 있다. 그럼에도 ‘초기 기독교의 발흥’에 대한 탐구서로서, 이 책은 깊은 영감을 준다. 거대한 이방 세계의 변방에서 출발한 미약한 종교 운동으로서 기독교가 어떻게 단 몇 세기 만에 세상을 지배하는 종교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300년의 기적 같은 부흥의 이면에는 그저 ‘기적’이라고만 치부할 수 없는 현실 속 요인들이 있지 않았을까?
로드니 스타크는 이 화두를 놓고 사회학자의 시선으로 2천 년 전의 세계를 깊이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가 길어 낸 통찰들은 역설적이게도 지금 이곳에 자리한 기독교에 매우 도전적인 결과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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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선교의 아버지인 사무엘 즈웜머     
-CP교회연합신문선교칼럼-
요즈음 카이로가 심상치 않다. 민주화 바람이후에 기독교에 대해서 심한 박해의 태풍이 불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그 땅에서 17년 동안 사역하였던 한 사람의 선교사를 소개 한다.
사무엘 즈윔머(Samuel Zwemer)는 1867년, 미국 미시간의 홀랜드(Holland)에서 열다섯 자녀 중 열 세번째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개혁교회의 목사였기 때문에 기독교적 토양 속에서 훈련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여러 형제 가운데에서 생존한 5형제 중 4명도 목회자가 되었으며 누이인 넬리(Nellie)즈윔머는 선교사로서 중국에서 40여년 동안을 사역하였다. 즈윔머가 선교사가 되기로 작정하게 된 동기는 호프대학(Hope College)에 재학중 일 때였다.

그는 4학년 재학 중 일 때에 죤 모트와 헐몬산의 100명을 감동시킨 로버트 윌더의 감동적인 설교를 듣고 7명의 학우 중 5명과 함께 선교사로 자원하였다.
신학교육과 의료교육을 받고난 이후에 즈윔머는 제임스 캔틴과 함께 개혁교회의 선교부에 아랍 쪽의 선교사로 보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거절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물러서지 않고 스스로 미국아랍선교회(American Arabian Mission)를 조직하여 모금운동을 시작하였다. 쉽지 않는 일이었지만 6,000Km 이상을 여행하며 선교의 도전과 함께 모금 요청을 하였다. 이들의 모금 방식은 특이한 전략을 가졌다. 즉 즈윔머는 캔틴의 모금을, 캔틴은 즈윔머의 모금을 진행하였다. 모금에 대한 어려움을 즈윔머는 “담임 목사님들의 냉담한 반응이 제일 큰 장애 요소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1889년 캔틴은 모금 여행을 마치고 아라비아로 떠났으며 1890년 즈윔머도 뒤를 따랐다. 페르시아만(Persian Gulf)에서의 사역 초기에는 진전도 없었고 반대도 심했다. 그러나 그들은 낙심하지 않았다. 이후에 팀이 나뉘어 사역하게 되었고 독신으로 5년을 고생한 즈윔머는 성공회의 교회 선교회에서 파송된 에이미 윌크스(Amy Wilkes)라는 간호원과 사랑하게 되어 결혼을 하게 되었다.

1897년 미국에서 안식년을 보낸 부부는 이후 페르시아만으로 돌아가 바레인의 무슬림들을 위해서 사역을 하였다. 전도지를 나누어 주고 노방전도를 하며, 가정을 심방하면서 복음을 전했지만 차가운 무슬림의 마음을 녹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후 가정적으로 슬픈 일이 있었다. 1904년 7월 네 살과 일곱 살 난 두 딸이 8일 간격으로 잇따라 눈을 감았다. 이러한 극한 상황 속에서도 결코 하나님을 원망하지는 않았다.

1905년 즈윔머의 아람 선교회는 4개의 기지를 갖게 되었으며, 개종자의 수는 적었지만 용맹스럽게 선교하였다. 이후에 미국으로 돌아가 동원 사역을 감당했지만 마음은 항상 무슬림 땅에 있었다. 결국 1912년 미국 장로교 선교회(United Presbyterian Mission)로부터, 카이로로 옮겨서 전 이슬람 세계를 위해서 선교사역을 하자는 제의를 받아드림과 함께 카이로에서 사역을 시작하였다.
카이로에 도착한 즈윔머는 청년들이 서구로부터 온 지식인 선교사로부터 열심히 배우고자 하는 개방적인 마음을 알았다. 그는 매주 마다 카이로의 아메리카대학에서 강의를 하였는데 학생들로부터 많은 호응을 받았다. 때로는 2만명 가까운 이슬람학생들 앞에서 집회를 인도하기도 하였다.

즈윔머의 사역 가운데 특이한 사건은 한 무슬림청년의 개종 이다. 즈윔머가 배포한 기독교서적을 무슬림 교수가 찢어서 쓰레기통에 버렸는데, 한 학생이 그 찢어진 전도책자를 붙혀서 읽다가 변화를 받아서 기독교로 개종을 하였다.
참으로 하나님의 선교를 알 수 없는 놀라운 일임을 알 수 있다. 즈윔머는 17년 동안을 카이로에 기거 하면서 선교본부를 조성하고 이슬람땅 사역의 교두보를 마련하였다. 이후에 세계를 다니면서 선교회의에 참여하였고, 선교기금을 확보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도, 중국, 인도차이나, 남아프리카의 무슬림들을 위해서도 사역을 하였다.

즈윔머의 사역은 점점 넓혀져 갔다. 특히 그가 집필한 무슬림 세계(Moslem World)는 영어권에서 무슬림 선교에 가장 권위 있는 책으로 정편이 나있다. 즈윔머의 생애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 특히 어린 딸과 동료들 그리고 두 아내의 죽음(한명은 1937년, 다른 한명은 1950년)은 참으로 어려운 고통 이었다. 이러한 극한 어려움을 이기고 20여명의 숭고한 신자를 얻었고 무슬림 선교의 아버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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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벤더 사무엘(Paul Bendor-Samuel) 선교사는
유럽 교회가 직면한 가장 큰 위기도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이슬람의 성장'이 아닌 '세속주의'로 단언했다.
사무엘 선교사는 "유럽의 교회들이 텅 비는 이유는 기독교인들이 무슬림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며 "사람들이 교회를 나가야할 이유가 사라지고 있다. 신앙이 점점 삶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주일에 영화관을 가거나 취미를 즐기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마치 무슬림들이 온 유럽을 뒤덮을 거라는 두려움이 커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며 "이슬람포비아를 확산시키는 잘못된 통계가 양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무슬림의 출생률은 그들의 교육 수준이나 부의 수준에 따라 굉장히 다양하게 나타난다"며 "무슬림 여성들의 교육 수준이 높아지면서 출산율이 낮아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교회, 무슬림에게 하나님의 사랑 전해야"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이슬람에 대한 우려에 대해서도 지나치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는 "최근에 한국의 종교 중에서 기독교가 가장 큰 규모라는 통계가 발표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오늘날 한국교회가 마주한 가장 큰 도전은 이슬람이 아니라 아무 신도 믿지 않는다고 대답한 사람들이 증가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의 역할은 "세속적이고 물질주의적인 환경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라며 무슬림들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그 사역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무엘 선교사는 "90%에 가까운 무슬림들이 기독교인과 친교를 나누고 있지 못하다는 충격적인 통계가 있다"며 "기독교인들은 우리에게 다가온 무슬림들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환영하고 우리에게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나눌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한편, 폴 벤더 사무엘 선교사는 인터서브 소속으로 1990년부터 2002년까지 튀니지에서 무슬림을 대상으로 의료선교 사역을 펼쳤다. 이후 2003년부터 12년 동안 인터서브 국제총재로 섬겼다. 현재는 옥스퍼드 선교연구센터(Oxford Centre for Mission Studies) 디렉터를 맡고 있다.
(c) 데일리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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